서동필 작가 에세이(31) - 모정의 밤

동작경제신문 승인 2021.10.18 16:48 | 최종 수정 2021.10.18 17:19 의견 0

뚜껑을 열자 역한 쉰 냄새부터 확 올라왔다. 일일이 외피를 벗기고, 내피까지 먹기좋게 까놓은 삶은 밤이었다. 난 일주일 전 아내가 삶아놓은 밤을 몰래 세 시간에 걸쳐 깠다. 힘들게 살던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선 해마다 이 맘때쯤이면 생밤을 자루 채 들여와 물에 불린 뒤 밤까는 부업을 했었다. 그때부터 고사리손으로 야무지게 밤을 깠으니 밤 까는 건 내 전공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날 밤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애들을 위해, 그리고 아내가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깜짝이벤트를 벌였다. 이런 류는 나만의 사랑 표현방식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까놓으면 금세 먹을 줄 알았다. 그랬기에 한 자리에서 허리한 번 펴지않고 같은 자세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그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다. 손가락 끝이 무딘 칼 날의 압력에 아른거려왔지만, 락앤락 용기에 가득 채워져 냉장실에 몰래 넣을 땐 그만한 희열도 없었다. 그런데 다 먹었을 줄 알았던 밤이 절반가량 남아 쉬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동필 작가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깐 밤


반찬을 꺼내다 냉장고 속 깊은 곳에서 그 용기가 발견되자 깊은 탄식부터 절로 나왔다. 아내와 애들에게 "다 먹어버리지 왜 남겨놨냐"라 물으니 내가 힘들게 작업한 밤을 도저히 모두 다 먹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내 몫이라하며 남겨놨단다. 아내도 내가 먹을 줄 알았고, 끼니마다 반찬을 꺼내고 넣다보니 냉장실 제일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 누구도 존재의 유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상했다. 고생해서 깐 것도 있었지만 이 밤은 보통 밤이 아니었다. 하나라도 허투로 버릴 수 없던 밤이었다. 실제로 그 날, 밤을 깔 때 벌레가 먹은 것도 버리지 않고 잘 도려내가며 깠었다. 그렇게 살이라도 한 점 떨어질까, 내피에 딸려 버려지지는 않을까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깐 밤이었다. 난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지난 추석을 이틀 앞 둔 자정경 시골에 사는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밤 10시 넘어선 웬만해서 서로 전화를 하지 않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고열과 근육통, 몸살로 쓰러지셔서 급히 응급실로 모시고 왔다는 전화였다. 쓰러지시기 전 5일 전부터 열이 나며 증세가 발현됐었다 했는데, 무지하게도 참으면 괜찮을 줄 알고 홀로 버티다 병을 키웠다고 한다. 그나마 마지막 기력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순간을 맞이할 뻔 했다고도 했다. 늘 어지간해선 병원 출입을 하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시기에 자식들과도 종종 마찰을 겪어왔었다. 그런데 급기야 이번에 쓰러지기까지 하시며 결국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난 놀란 가슴에 당장 서울에서 고향 순천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동생은 그런 날 극구 말렸다. 그러면서도 다른 더 큰 문제가 있다며 걱정을 쏟아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일단 코로나 검사부터 받은 뒤, 음성판정이 내려진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코로나 검사가 우선이라니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지난 7월 백신접종 2차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그러나 돌파감염의 기세가 이리 무서우니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코로나 검사를 진행했다. 어머니의 의식은 혼미했다. 동생 내외가 곁에서 부축하며 힘겹게 검사를 마쳤다. 일단 내일 아침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택에서 기다려야 한다했다. 저토록 힘들어하시며 아파하는 어머니를 오늘 밤 어찌 지켜봐야 하며, 어머니는 또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동생은 걱정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생에게 면목이 없었다. 첫째인 내가 지금 어머니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틀 후 추석에 최대한 빨리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뵙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발 코로나 검사도 음성이 나오고, 병증도 독한 몸살 정도로 끝나길 빌었다. 농사를 짓다 보니 혹시나 쯔쯔가무시같은 병에 걸리진 않으셨을까 나와 동생은 밤새 노심초사 잠을 못이뤘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동생에게 통보가 왔다. 천만다행히도 코로나 검사 음성이 나왔으니 빨리 어머니를 모셔오라했다. 지난 밤 어머니는 끙끙 앓으셨으며 동생 내외는 그런 어머니를 뜬눈으로 간호해 드렸다. 조마조마하며 의사 선생님의 진료를 기다렸고 곧 검사결과가 나왔다. 독한 몸살이 왔다며 어떻게 이 지경이 돼도록 어머니를 내버려뒀냐고 동생을 혼내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본인이 말 안하고 버티다 그런거라며 동생을 감싸셨다. 어찌됐든 링겔 주사 맞고 약 잘 먹으면 2,3일이면 괜찮을거라 했다. 큰 병 아니니 너무 걱정말라며 미소로 다독거려 주셨다. 그러나 농삿일을 무리하면 생기는 병이니 집에 잘 모셔가 반드시 푹 쉬어야 한다는 주문도 하셨다. 그제야 동생 내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의술과 인술을 동시에 보여주신 의사 선생님의 진료에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대처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 지 숙제로 남게 되었다.

​추석 전날 부리나케 내려가 어머니를 뵜다. 대문 밖에서 "어머니, 저 왔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니 "염병할 놈이 즈그 엄마 쓰러져 죽어버려도 모를 것이다."라며 괜한 푸념을 반가움으로 대처하며 억세게 날 맞이하셨다. 카랑카랑한 어머니 목소리엔 그리움과 사랑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어머니는 다시 완쾌되어 있었다. 이틀 전 동생에게서 들은 중병환자였었나 의심 스러울 정도로 평소 강인한 어머니로 다시 돌아오셨다. 마침 고생한 동생도 있어 따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안방 아랫목으로 모셨다. 동생과 난 내려오기 전 이미 전화로 입을 맞춘 터였다. 두 아들이 그 앞에 앉았다. 일단 왜 그토록 심한 몸살이 났는지 병의 발단 원인부터 여쭈었다. 또한 병을 왜 이리 매번 크게 키우시는지 그 고집을 깨트리기 위한 양면작전에 들어갔다. 코너에 몰린 듯 미안함을 감지한 어머니는 사실대로 일주일 전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는 절친 3인방이 있다. 여기서 어머니가 막내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의 친척이 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의 밤나무골에 사신다고 한다. 밤나무골은 밤이 많이 나 불리게 된 명칭이다. 그런데 올 봄 친척분이 돌아가시며 관리하던 밤나무 산이 그대로 방치되어 버렸다 했다. 그곳은 차가 닿기 힘든 곳으로 걸어가야만 했는데 언니의 주도로 밤을 따러 가기위해 세 분이 뭉친 것이었다. 그렇게 깊은 산 마을로 세 분은 호기좋게 떠나셨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밤산을 휘비며 밤을 따고 줍기를 반복했다. 처음이야 따는 재미, 줍는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밤송이에 곳곳을 계속 찔리다보면 가시 독에 오르기도 하고, 때론 가시가 박혀 고통스럽기도 한다. 자루가득 쌓인 밤을 이리저리 끌고다니기엔 여린 할머니들이 힘에 부쳤을 것이고, 가뜩이나 굽은 허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늦은 밤이 다 되서야 그 무거운 자루를 끌고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시름시름 열이 올라오고 몸이 아프셨다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버티셨는데 3일 째 되던 날부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아팠으며, 4일째 되던 날엔 물조차 삼키실 수 없었다 한다. 그렇게 버티시다 5일 째 되던 날 급기야 정신까지 혼미해지자 쓰러지기 직전 동생을 부른 것이다. 어머니는 매번 그러셨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웬만하면 참으셨고, 때론 정말 운이 좋아 약없이 쾌차하기도 하셨다. 사실 나도 피는 못 속이는지 그런 어머니를 너무나 쏙 빼닮아 탈이다. 병원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플 때만 찾는다. 대부분 그럴 땐 병을 키워 가는 격이 되곤 한다. 그런 어머니를 지금 더했으면 더한 내가 다그치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그렇게 사시냐며 역정을 냈다. 앞으론 제발 미련스럽게 일하시지 말라며 목이 메게 호소를 했다. 계속 그렇게 일 하시면 결국 나중에 자식들 고생시킬 것이고, 제 명보다 일찍 가실 수도 있다며 협박까지 늘어놨다. 두 자식은 토하고 어머니는 잠자코 듣고만 계시는 추석날 밤이 점점 깊어만가고 있었다. 둥근 보름달은 이를 아는 지 모르는지 자리를 옮겨가며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드디어 한 참만에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니들 말 알겄다. 나도 이 번에 디지게 아파본께 겁나드라. 앞으론 아프면 당장 병원 갈것잉께 걱정하덜 말아라. 글고 농사 일도 줄일란다.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파, 하고 싶어도 못하긋다. 여그 손가락 봐라. 마디가 휘어 펴지지도 않는다. 나도 이제 경로당 다니며 고스톱 치고 놀란다. 영철이네는 자식들이 돈 내줘서 해외여행도 자주 가싸고 그러드만. 느그들도 앞으로 용돈 많이 내놔야 할것이다 잉. 알겄재? 그리고 내가 싸줄것잉께 이 번에 따온 밤들 챙겨가 삶아서 묵어라. 겁나 달고 맛있더구마잉. 울 아그들도 꼭 맥이고. 나가 느그들 줄라고 그 재미로 뒤지게 따왔재 뭐들라고 그까지 쌔가 빠지게 갔다 왔겄냐? 긍께 꼭 가져가서 하나라도 허투로 버리지 말고 맛나게 묵어라잉. 글고 느그 엄마가 뒤졌는지 살았는지 전화라도 좀 자주해라 써글겄들아. 알았재?"

어머니는 형제가 드리는 호소와 반강제 협박에 흐뭇해하신게 틀림없었다. 당신의 욕설섞인 대화체, 강한 엑센트 섞인 음질, 즉흥적이고 과격한 몸짓을 보면 우린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의 미소 또한 익히 봐오던 따뜻한 눈빛이었다. 다행이었다. 어릴 적부터 강한 내 어머니가 아직도 무섭지만, 난 그런 어머니덕에 지금의 나로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몇 가지 다짐을 받았고, 또 몇 가지 행복한 협박도 받았다. 기꺼이 해 드릴것이다. 좀 더 가까이 어머니를 둘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도 우리와 나눈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또한 점차 바뀌어 갈 것이다. 다음 날 우린 어머니의 당부와 강제적 할당으로 그 난리를 일으키게 만든 밤을 각자 집으로 가지고 와 삶아 먹었다. 바로 그 밤이었던 것이다.


난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물리칠 순 없었다.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밤이었던가? 즉각 흐르는 수돗물로 헹궜다. 그리고 냄비에 밑바닥만 물을 채운 뒤 다시 삶았다. 그렇게 십 여분 삶으니 쉰 기가 많이 사라졌다. 다소 흐트러지긴 했지만 이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은 그런 날 걱정하며 먹지말라 만류했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을 걸 알기에 더 이상 제재하지 못하고 그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만 봤다. 수저로 한 스푼 떠 시식을 했다. 냄새도 거의 안 나고 먹을만 했다. 다만 무미건조한 맛에 무얼 먹고 있는 지 도저히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난 그날 밤 저녁을 밤 식사로 대신했다. 먹는 내내 어머니의 달콤한 사랑을 상상했고, 자식을 향한 그리움의 맛을 그렸다. 퍽퍽함이 잠시 목메임으로 올라왔으나 다행히 버텨낼 수 있었고, 그렇게 어머니가 보내주신 모정의 밤을 모두 취식 완료했다. 사실 난 습관성 장염 및 역류성 식도염에 자주 걸리는 편이다. 그런 음식물 관련 예비 환자가 상한 음식을 먹었으니 어찌보면 또 미련한 짓을 한 셈이다. 하지만 제발 별 탈 없기를 바랬다. 설사 이상증세가 와도 일단 참아볼 계획이다. 그러다 용케 넘어가면 다행이다. 특히 이번엔 모정의 밤을 먹었으니 내 몸에 항체가 생겨 별탈없이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분명 아프지 않도록 어머니가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다. 난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자,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 페루 마추픽추 정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동필 작가


◆ 서동필작가 프로필 ◆
1975년 12월 10일 전남 승주군 별량면 출생(현 전남 순천시)
1994년 순천 매산고 졸업
1998년 순천대 ROTC 36기 소위 임관
2004년 육군 대위 전역
2008년 (주)리싸이클시티 가맹점 대표
2018년 사단법인 한국여행작가학교 수료
2019년 은평지역신문 참여기자
2019년 작가 등단 ‘나는 751210 이라고 해’ 첫 번째 에세이집 발간
2020년 은평 새마을 청년 지도자 협의회 활동
2020년 10월 '뒤돌아보니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더라' 두 번째 에세이집 발간
2020년 제10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입선
2021년 제11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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