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 발족된 교육개혁심의회에서 입시 개혁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교육개혁심의회가 제시한 개선안은 학생 선발에서 대학의 권한을 대폭 허용하는 방안이었다. 대학입시는 국가가 실시하는 학력고사에다 고등학교 교과 성적을 반영하여 선발하는 국가 관리 모형에서 대학 자율 모형으로 바뀔 전망이었다.

1985년은 학력고사와 대학별로 논술고사를 보던 때였다. 과목수도 많았다. 보도를 보면 “문교부는 31일 87학년도 이후 대학 입학 학력고사 과목을 현재의 자연계 15, 인문계 16개에서 3개 계열 모두 각 9개로 축소하고, 국어·수학·영어·국사·국민윤리 등 5개 과목은 3개 계열 공통필수로 하며, 계열별로 3∼4개의 선택과목 군을 설정, 각 선택 군에서 1∼2 과목씩 모두 4개 과목을 선택토록 하는 고사과목 조정내용을 확정, 발표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중앙일보 1895.10.31. 2023.08.12. 검색.https://www.joongang.co.kr/article/2023056#home)
학력고사가 많은 과목의 암기 실력을 측정하는 방식이어서 학생의 창의력 신장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대학의 선발권 내지는 자율성을 해치니 학력고사를 개선하자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1986, 87학년도에 실시했던 논술고사 역시 창의력보다는 암기력에 의존한다고 비판받았었다.

교육개혁심의회는 1985년 9월 대학입시제도 운영의 기본 전제로 “대학입학전형은 원칙적으로 개별 대학의 재량과 책임하에 수행하도록 한다. 대학입학전형은 대학의 계열, 학과의 특성과 학생의 적성 및 소질이 합리적으로 연계되도록 해야 한다. 대학입학전형 제도는 중등학교 교육의 정상적 운영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운영돼야 한다.”고 정했다. (매일경제 1985.09.13. 2023.08.09. 검색.https://www.mk.co.kr/news/economy/700777)
1986년의 교육개혁심의회 보고서에는 입시과목 위주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문제, 입시학원 같은 분위기의 학교 문제, 정답을 골라내는 평가의 문제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을 하기 위하여 주입식 교육과정, 정답을 골라내는 평가, 교사 중심의 일방적 수업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개혁심의회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입제도가 수월성을 추구하고 다양성을 확보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입학 전형이 다양하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여러 가지 자료를 포괄적으로 운용하고 각 대학은 그것들을 선택적으로 운용할 것을 제안했다.

교육개혁심의회가 1986년 7월에 보고한 대입제도 개선방안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동아일보, 1986년 7월 16일자). (강태중 외 2013. 재인용)

○ 대입학력고사를 대학교육적성시험으로 전환한다.
○ 적성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해 대학 지원을 허용하여 적성시험 성적과 고교 내신 성적 그리고 대학별 평가 성적 등을 합쳐 입학적격자를 선발한다. (단, 대학별 평가는 보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되어야 한다.)
○ 각 대학의 학생선발권을 살리도록 계열이나 학과의 특성에 따라 선택과목을 지정, 예시하거나 과목별 가중치를 적용할 수 있다.

이 안은 예비고사를 봐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본고사를 보고, 본고사 성적과 학교 성적을 반영하여 선발하던 1970년대 말의 방식과 유사하다. 단 국가고사가 적성시험으로 달라진다는 점이 큰 차이였다.

김영철 외(2007). 대한민국 교육정책사 연구에서는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89년 스승의 날(5월 15일) 무렵 어느날 저녁,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역대 문교부 장관 모임이 열렸다. 정원식 문교부 장관(총리 역임)은 전임 장관들에게 “학력고사를 없애고 대학입학 적성시험(훗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만들면 어떨지”를 물었다. 정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교육개혁심의회가 1986년 7월 최종보고서 ‘교육개혁 종합구상’을 통해 적시한 “학력고사를 ‘대학입학 적성시험’으로 발전시킨다”는 방안을 이날 모임의 화두로 던진 것이다. 정 장관은 취임 이후 ‘수능의 산파(産婆)’ 박도순 교육부 대학교육심의회 전문위원(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역임, 전 고려대 교수)과 수능 도입 문제를 심층적이면서도 열정적으로 논의해온 터였다. (중략) 수능은 교과목을 뛰어넘는 고차적인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는 시험이라는 측면에서 학력고사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김영채 계명대 교수(철학박사)가 미국의 입시제도 등을 염두에 두고 오래전부터 ‘대학교육 적성검사’란 이름으로 제안해온 것이기도 했다.

수능 도입은 문교부가 교육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장관도 윤형섭 장관(연세대 교수)으로 바뀐 1991년 4월 발표됐다. 교육부는 “1994학년도 대학입시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연 2회 시행하고 각 대학별 본고사는 부활한다”는 내용의 ‘새로운 대학입학시험제도 개선안’을 내놓은 것이다. 첫 수능이 치러진 1993년 8월 20일 언론은 찬사를 보냈다. “탈교과-통합 출제, ‘산교육’ 기대”(국민일보) “암기식 탈피 탐구교육 전기로”(서울신문) “암기위주 즉답형 학력고사 한계극복”(세계일보) “비정상 교육 풍토 쇄신의지 담아”(한겨레).”

개선 과정은 다음과 같다.

▲88.5 문교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개선방안 연구의뢰
▲89.8 대학교육협의회, 내신+적성시험+대학별고사 실시내용의 방안 마련
▲89.8 문교부, 개선안에 대한 서울. 대전지역 공청회
▲89.12 中敎審(중앙교육심의회), 내신(40%이상 반영)+적성시험+대학별본고사 등 개선안 확정
▲90.2 교육정책자문회의, 내선성적(필수)+적성시험 반영 비율과 대학별고사 실시 여부 및 반영 비율 각대학 자율화 건의
▲90.2 교육부, 中敎審에 교육정책자문회의 건의안 再審 의뢰
▲90.2 교육부, 새 대입개선안 시행 시기를 93학년도서 94학년도로 연기 발표
▲90.4 中敎審, 교육정책 자문회의 건의 수용한 조정안 마련
▲90.12. 적성시험 모형개발 제1차 모의시험 실시
▲91.1. 盧대통령 연두기자회견서 大入개선안 조속 마련 지시
▲91.1 中敎審, 내신40%이상 반영+적성시험 20%이상 반영+대학별고사자율화 내용의 개선 조정안 마련
▲91.2 교육정책자문회의, 내신성적 필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대학별고사 각 대학 자율화 건의
▲91.2 대학교육심의회 발족
▲91.2 大敎審, 내신+수학능력시험(1회원칙. 적성시험개칭)+대학별고사 자율화안 심의 통과
▲91.3 大敎審, 수학능력시험 2회 실시하는 조정안 마련. 서울. 대구. 광주 3개 지역서 공청회
▲91.3 大敎審 최종안 확정, 교육부에 건의
▲91.3 교육부. 민자당과 대입 개선안 협의
▲91.4 大入 개선안 확정 발표

(연합뉴스 1991.04.02. 2023.08.12. 검색.https://www.yna.co.kr/view/AKR19910401004700004)

강태중 외(2013)에서는 다음과 같이 개선 과정을 적었다.

1989년에 공개된 대학교육적성시험의 문제 모형은 교과내용을 암기하여 풀어내던 학력고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언어영역, 수리영역, 공통검사영역으로 이루어진 이 시험은 대학 강의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 성격이 지능검사와 혼동되고 모호하다는 논란 때문에 1990년에 발표된 대입제도 최종 개선안에서는‘사고력을 측정하는 발전된 학력고사’로 정의되었고, 1991년부터는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 불리게 되었다(동아일보, 1990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1991년 3월 13일자).

이 시험은 반영 비율과 실시 횟수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는데, 인문 자연 계열은 30% 이상, 예체능 계열은 40% 이상을 필수로 반영하라던 것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바꾸고, 두 차례 치르기로 했던 것을 한 차례만 치르도록 하자 했다가 다시 두 차례 실시하기로 하는 등 논의 과정에서 계속 변동이 있었다(동아일보, 1991년 3월 13일자).

한편 1991년 3월에는 민자당에서 “새 개선안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연2회 본 뒤 다시 본고사까지 치르도록 하고 있어 현행 학력고사제도에 비해 학생들에게 2중으로 시험 부담을 안겨준다.”며 이의를 제기해 개선안 확정이 늦춰지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91년 3월 29일자).

거듭되는 논란 중에 모두 7차례의 실험평가를 거쳐 만들어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4개 영역(언어, 수리Ⅰ, 수리Ⅱ, 외국어), 190개 문항, 200점 만점의 5지 선다형으로 그 양식이 확정되었고, 1994학년도 입시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한겨레, 1993년 1월 9일자). 실시 전까지 여러 가지 우려가 있었던 이 시험은 실시 이후 내신 성적과 상관관계가 큰 것으로 나타나 객관성을 인정받았고, 주입식 교육을 탈피해 토의와 독서, 작문 등을 중시하는 변화를 만들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동아일보, 1993년 11월 17일자).

1986년의 교육개혁심의회의 개선안에 따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일종의 자격고사로 이 시험을 통과해야 각 대학의 입시 전형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격고사의 역할을 하기보다 여러 전형 요소 중 하나로 반영되었다. 성균관대와 포항공대가 수능 성적에 근거해 본고사 지원 자격에 제한을 두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특별한 제한이 없이 수능 점수를 입시 총점에 반영했다(경향신문, 1993년 10월 7일자). 본고사를 실시하는 대학의 경우에는 수능성적의 반영비율이 본고사와 같거나 오히려 낮은 경우도 있었지만, 본고사를 실시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대학들의 경우에는 수능성적을 비중 있게 반영했다(한겨레, 1993년 9월 21일자).

1994학년도 입시전형이 이전과 달랐던 또 한 가지는 본고사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심의회의 개선안에는 대학에 선발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보완적인 성격의 대학별 평가를 실시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후에 교육부의 방침도 계열 혹은 학과의 특성상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전공 기초시험을 치르도록 허용했다(동아일보, 1986년 7월 16일자). 이에 따라 1993년 2월까지만 해도 40여 대학이 본고사를 치르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몇 대학에서 입시 부정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고 난 뒤, 교육부의 방침이 본고사 폐지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경향신문, 1993년 4월 17일자). 또한 본고사를 출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부담되었던 대학들이 점차 본고사 폐지를 발표함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서울대 등 9개 대학만이 본고사를 치렀다. 그래서 새 대입제도는 대학별로 다양하게 치러질 것이라는 본래의 계획과 달리,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과 고교 내신이 중심이 되었다(동아일보, 1993년 5월 1일자).

고교 내신 반영은 의무적으로 입시 전형 총점의 40% 이상이 되도록 했고, 그 중 80%는 교과성적, 10%는 출석, 10%는 행동발달 특별활동 및 교내외 봉사활동으로 구성하여 고교 전인교육을 강조했다. 그런데 내신 성적의 반영 비율이 높아지자, 1993년 5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새 입시제도 개선안이 담긴 교육법 시행령이 통과되는 날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한겨레, 1993년 5월 22일자).

주된 반대 의견들은 외국어고와 비평준화 지역의 학부모들로부터 나왔다. 안양과 부천의 학부모들은 본고사 일괄 실시, 전국 비평준화 지역 고교 내신등급을 5등급으로 축소 조정, 수학능력시험을 근거로 한 내신 성적 산정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일부 학생들은 본고사를 포기하고 내신과 수능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대학들이 늘어나자 내신 성적을 높이기 위해 자퇴하거나 전학을 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93년 7월 11일자).

내신 성적 반영률을 높이는 것이 우수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의 수험생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은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또한 상위권 대학의 경우, 중하위권 대학에 비해 지원자들의 내신 성적으로 인한 1점차가 가진 영향이 크다는 점 때문에 내신 성적의 학교 간 격차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문교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내신 반영 복수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내신 성적을 산출할 때, 5등급제와 10등급제를, 혹은 5, 10, 15등급제를 모두 적용하여 복수안을 만들어주면, 대학이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활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경향신문, 1989년 11월 22일자).

그러나 이 안은 이후에 문교부 의뢰로 이루어진 고교내신제 연구결과에 따라 실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 간 학교 간 학력 격차가 분명히 있지만, 교육여건이 열악한 읍면지역 학생들에게는 내신제도를 통해서라도 일종의 가산점을 줄 수 있도록 학교 간 학력격차를 무시하는 것이 좋다⓵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 1991년 3월 19일자).

한편 25개 대학(10,468명)이 특차 모집을 실시했고, 각 전형시기마다 입시 일자가 다르면 복수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여 수험생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응시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러나 112개 대학 중 87개 대학이 동시에 본고사나 면접을 치러 실제로는 복수지원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동아일보, 1994년 1월 14일자).

교실 수업이 학생의 창의성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대입을 고등학교 교육에 연결하기 위하여 대입 개선을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논란도 많았고, 91년 초에는 93학년도부터 시행하기로 한 결정을 1년 뒤로 미루기도 했다. 그러다 90년 말에 1회, 91년에 3회 92년에 3회에 걸쳐 실험평가를 실시하고 93년 여름 드디어 수능 첫 시험을 보게 되었다.

언어는 국어과의 영역이었으며, 수리・탐구(Ⅰ)은 수학, 사회탐구에는 국민윤리, 국사,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가 포함되었고, 과학탐구에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포함되었다. 외국어는 영어가 포함되었다.

1991년 고등학교 입학한 학생은 상위권 대학에 가려면 수능과 학교성적도 좋아야 하고 대학별 본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대학별로 과목도 달랐다. 연세대는 제2 외국어가 없었던 데 반하여 고려대는 제2 외국어가 있었다.


여름에 냉방도 안 되던 시절, 선풍기에 더위를 참으며 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 열풍이 분 것이 1994년 8월인 것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수능 1차 시험은 8월 16일, 2차 시험은 11월 16일에 실시되었는데, 2차 시험이 1차 시험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점수가 원점수와 백분위로 제공되었는데 대부분 대학은 원점수를 사용했다. 그런데 2차 시험이 더 어려워 원점수가 낮게 나왔다.

◆◆◆◆◆ 각주 ◆◆◆◆◆

⓵장석우,장언효(1991). 대학입시에서의 고교내신성적 반영방법의 타당화 방안 연구, 교육학연구, 29권 2호. pp.129-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