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립스틱 하우스(3) 974호실의 하루

한 요양병원의 시한부 소녀환자의 손에서 떠나지 않던 빨간 립스틱… 그녀는 얼마 남지 않는 날들의 희망을 립스틱으로 그려갔던 게 아닐까? 정한일 작가의 <립스틱 하우스>는 그렇게 지어졌다. 간병 5년차… 그의 일기를 펼친다.

동작경제신문 승인 2021.10.18 15:15 | 최종 수정 2021.10.20 13:44 의견 0

차례
1. 5월 9일 어머니의 꽃
2. 5월 13일 소변을 받으면서
3. 5월 16일 974호실의 하루
4. 5월 17일 빗소리처럼
5. 5월 18일 974호실의 흑역사(黑歷史) 1
6. 5월 20일 974호실의 흑역사(黑歷史) 2
7. 5월 21일 974호실의 흑역사(黑歷史) 3
8. 5월 24일 가위바위보
9. 5월 25일 코를 골다
10. 5월 25일 똥의 화증(火症)
11. 5월 26일 아이들에게
12. 5월 29일 어떡하지?
13. 5월 29일 맡기다
14. 5월 31일 리포트 - 식욕에 관하여
15. 5월 31일 연애꾼처럼
16. 6월 01일 파랑새 면회 가기
17. 6월 02일 일희일비(一喜一悲)
18. 6월 04일 리포트 - 운동에 관하여
19. 6월 05일 립스틱이 필요해
20. 6월 06일 립스틱으로 그린 집

5월 16일, 974호실의 하루

입원 열흘 만에 아버지는 왕고참이 됐다. 그간 이 방을 거쳐간 환자는 여덟… 고참 다섯, 신참 셋이다. 그리고 아직 남아 방을 같이 쓰는 신참 넷… 9B 병동 974호실에서 모두 열두 명을 만났다.

퇴원 환자들 중 오직 한 사람만 기억에 남는다. 전임 왕고참… 당시 경황없이 지낸 탓인지 다른 환자들은 거의 기억에 없다. 다만 신참들이 고참들보다 덜 희미할 뿐…

입원 열하루째… 아직 비어 있던 전임 왕고참 자리에 아침 일찍 신참이 들어왔다. 열세 번째 환자다. 오늘은 신참들의 교대도 이뤄졌는데, 바로 자칭 심마니 환자가 퇴원하고 열네 번째 환자가 저녁 늦게 입원한 것.

다음은 신참들의 면면… 교통사고로 하지 수술을 받은 환자, 중풍이 있으면서 골반 수술을 받은 욕쟁이 환자, 동맥폐쇄로 두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환자, 그리고 열세 번째, 열네 번째 환자…

방금 열세 번째 환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응급실 행… 아침 수술 후 병실로 돌아왔는데… 수술 경과가 어떤지 무척 궁금하다. 열네 번째 환자는 몇 달 전 여기서 무릎 수술을 받고 집에서 요양중 염증이 생겨 다시 왔단다.

밤 11시 20분…

현재 병실을 지키는 환자 넷 중 둘은 곤히 잠에 빠졌고, 나머지 둘은 엎치락뒤치락… 그 중 한명이 두 다리 절단을 근심해야 하는 동맥폐쇄 환자이고, 다른 한명은 내일 모레 퇴원을 앞둔 교통사고 환자… 침대째 실려나간 열세 번째 환자의 자리가 휑하다.

새벽 3시 30분…

왕고참이 오줌이 마려워 옆에서 간병중인 아들을 깨웠다. 시트를 갈고 바지를 갈아입으니, 어~ 시원하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본다.

열세 번째 환자의 자리가 여전히 휑하고… 동맥폐쇄 환자와 교통사고 환자가 자리에 없다. 처지가 극과 극이지만 둘이 죽이 맞아, 9층 아래 로비 바깥에서 흡연으로 서로의 심사를 달래주고 있으리라. 욕쟁이 환자가 일어나 한바탕 욕을 토하며 침대에서 내려간다. 저만 빼고 로비로 간 동료들을 탓하는 듯…

새벽 3시 50분…

열세 번째 환자를 빼고 다들 다시 모였다. 복도 등이 꺼지고… 열네 번째 환자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잠 대신 대화를 선택하는 신참들… 날이 밝기 전에 시작되는 974호실의 하루… 왕고참의 곁에서 잠시 단잠을 청한다.

저작권자 ⓒ 동작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